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 잊지말아요! 을사늑약 체결

기억하겠습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국가보훈처는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11월 17일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에서 개최합니다. 순국선열의 고귀한 독립정신과 그 희생을 기리기 위한 날인데요. 순국선열의 날은 왜 '11월 17일'로 지정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기념식이 진행되는 '덕수궁 중명전'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 그 궁금증을 지금부터 풀어드리겠습니다~!

 

 

순국선열 뜻

殉國先烈 / 목숨 바칠(순) 나라(국) 먼저(선) 세찰(열)

순국선열 뜻은 일제에게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투쟁을 벌이다 광복을 맞기 전 목숨을 잃은 분을 일컫습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의사, 열사 또는 의병 분들이 해당합니다.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다른 말들을 알아볼까요?

* 애국지사 : 일제에 맞서 빼앗긴 주권을 찾으려 한 독립운동가를 뜻하는 말로 순국선열과 그 의미가 같지만, 광복절(1945.8.15)을 기준으로 살아서 광복을 맞이하신 분들을 애국지사로 구분합니다. 

* 호국영령 :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명예로운 영혼을 뜻하며,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가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다 희생된 분들을 말합니다. 

 

 

순국선열의 날 유래

매년 11월 17일은 법정기념일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국권 회복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위훈을 기리기 위함으로 제정된 이 날은 사실 우리 민족에게 원통하고 가슴 아픈 날입니다. 일제에게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기게 된,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 바로 1905년 11월 17일이기 때문입니다.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통곡을 합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았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목놓아 외쳤습니다. 민영환 열사와 조병세 열사는 원통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최익현 선생과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31회 임시총회에서는 지청천, 차리석 의원의 제안에 따라 을사늑약이 체결된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 기념일(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하게 됩니다. 을사늑약을 전후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분들을 기리기 위한 이 날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관하여 행사를 치르다가 이후 민간단체를 거쳐 마침내 1997년 정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습니다. 

 

△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및 순국선열의 노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04년 2월 8일. 한국 주도권 쟁취를 위한 러시아와 일본 양국 간의 전쟁(러·일전쟁)이 발발합니다. 8월 22일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대한제국과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했고, 서양 열강들의 묵인과 승인을 위한 과정에도 주력합니다. 이후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일본의 식민지화를 승인받게 되었고, 미국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을 통해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습니다.

 

 

1905년 11월 10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만나 대한제국 외교권 강탈한다는 일본 왕의 친서를 전달하고 며칠 후 고종을 다시 만나 조약 체결을 강요합니다.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대신들이 을사늑약 체결에 강경하게 저항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 포섭에 나서는 한편 일본 군대를 궁궐 주변에 배치하여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 고종 황제

 

11월 17일 다시 열린 회의에서도 좀처럼 의견 일치를 보이지 못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회의에 직접 나서 대신을 한 사람씩 대면하며 조약 체결 찬성을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대신 8명 중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사오적)이 문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대신들 중 그 누구도 고종 황제로부터 조약 체결을 위임받지 않았고,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의 찬성만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버리고 맙니다.  

 

△ 을사오적

 

을사늑약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가 돼버리고 만 것이죠. 이후 일본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간섭을 시작했으며, 결국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주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덕수궁 중명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로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협약이 아닌 강제로 맺어진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조약이 아닌 '을사늑약'이 정확한 표현임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 을사늑약 체결 장소 : 덕수궁 중명전

 

대표적인 순국선열 인물

1. 순국선열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인물인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역에 도착합니다. 그때 6발의 총성이 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대로 쓰러지죠. 

 

△ 순국선열 안중근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 

군중 속에서 소리치던 사람은 바로 안중근 의사였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사형선고를 받고 31세의 나이로 뤼순 감옥에서 순국합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쓸 것이다." - 안중근 의사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아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다.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모두의 분노를 짊어진 것이다." - 안중군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 순국선열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2. 순국선열 윤봉길

윤봉길 의사는 조국 광복의 큰 뜻을 품고 가족 몰래 중국으로 떠납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는 일본 천황의 생일이자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전승기념식이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2만여 명의 군중이 보였던 그날 오전 11시 40분경, 경축대에 모여있던 일본군 수뇌부와 고위 관리들을 향해 던진 윤봉길 의사의 물통 폭탄이 터집니다. 이를 두고 중국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며 놀라워하기도 했죠. 

 

 

안타깝게도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19일 아침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에서 순국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24세였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윤봉길"

 

△ 순국선열 윤봉길

 

그 외에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분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했던 순국열사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순국열사의 용기와 희생으로 만들어진 오늘을 감사하며,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 순국선열 유관순, 안창호, 이봉창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잊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순국선열 유관순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 순국선열 안창호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 순국선열 이봉창 

 

△ 순국선열 신채호

"역사를 잊은 민족에는 미래가 없다" - 순국열사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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